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장계전쟁 (문단 편집) == 배경 == [[국민당의 2차 북벌]]로 1928년 6월 베이징이 함락되었고 [[황고둔 사건]]이 발생하면서 대원수 [[장쭤린]]이 암살당했다. 만주 구파의 추대로 [[봉천군벌]]의 수장이 된 [[장쉐량]]은 국민정부에 합류하기로 결정하면서 [[동북역치]]를 단행했고 [[위안스카이]] 사후 10여년 만에 중국 통일이 완수되었다. 장제스는 1928년 탕산에서 [[펑위샹]], [[옌시산]], [[리쭝런]] 등 국민정부의 실력자들을 소집하여 군축을 위한 회의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1929년의 [[편견회의]]가 되었다. 하지만 이 편견회의는 군벌들의 반발을 샀다. 사실상 지방의 독립군주로 행세하던 군벌들이 자신들의 기반인 군대를 줄일 리 없었던 것이다. 여기에 더해 장제스가 [[후한민]]과 함께 난징의 중앙정부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각 지방의 정치분회를 폐지하기 시작하자 불만을 품은 군벌들의 반발이 시작되었다. 특히나 광서를 중심으로 하는 계계군벌은 장제스와 오랜 원한이 있었다. 광서파는 1927년 [[4.12 상하이 쿠데타]] 시절까지만 해도 장제스의 우군이었으나 [[영한합작]] 과정에서 왕징웨이에게 동조하여 장제스 하야를 압박하여 장제스와 틀어졌고 2차 북벌 이후 봉천군벌의 양위팅과 접촉하면서 공공연하게 반장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. 이 때문에 장제스는 계계와 자신은 양립할 수 없다고 불만을 품고 있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